프란체스코 스포르차
프란체스코는 상황에 어울리는 적절한 방법과 자신의 대단한 역량을 이용하여 일개 시민에서 밀라노 공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련 끝에 얻은 지위를 별 곤란 없이 유지했습니다.
반면에 흔히 발렌티노 공작이라고 부르는 체사레 보르자는 그 지위를 부친의 호의를 통해서 얻었으나, 그것이 다하자 그 지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가 타인의 힘과 호의로 얻은 영토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신중하고 유능한 사람이 의당 해야 하는 일들을 다했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한 것처럼 처음에 자신의 토대를 구축하지 않은 자라도 위대한 역량을 가지고 있으면 아마 나중에라도 그 일을 할 수 있겠지만, 이 작업은 그에게 수많은 시련을 안겨주며, 그나마 구축된 구조물도 매우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발렌티노 공작의 전체적인 행적을 보면, 그가 미래의 권력을 위해서 강력한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생 군주에게 제공할 만한 모범적인 지침으로 그의 활동을 예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의 노력이 종국에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의 실패는 전적으로 예외적이고 악의적인 운명의 일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나무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르자를 군주로 만들려고 하는 알렉산데르 6세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인 발렌티노 공작을 위대한 인물로 키우려고 시도하면서, 당시에는 물론 장래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첫째, 그는 아들을 교황령의 일부가 아닌 지역의 군주로 만들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만약 그가 교황령의 일부를 취해서 이들에게 주려고 한다면, 밀라노 공작과 베네치아인들이 이를 용납하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 이외에도 알렉산데르는 이탈리아의 군사력을 교황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모든 군사력을 오르시니 파와 콜론나 파 및 그 추종자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군사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존 국가들의 영토의 일부라도 안전하게 지지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에 혼란의 씨를 뿌려서,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일은 간단했는데, 베네치아인들이 다른 이유로 프랑스 세력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황은 이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루이 왕의 첫 번째 결혼을 취소시켜 줌으로써 이를 오히려 촉진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은 베네치아인들의 지원과 알렉산데르의 동의하에 이탈리아에 침입했습니다. 루이 왕은 밀라노를 점령하자마자 교황은 로마냐를 정복하기 위해서 프랑스 군대를 인계받았으며, 루이 왕은 이를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허락했습니다.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로 결심한 보르자
로마냐 지방을 점령하고 콜론나 파를 패배시킨 다음, 발렌티노 공작은 점령지역을 확보하고 영토를 확장하려고 했으나, 두 가지 걸림돌에 의해서 방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그가 자기 군대의 충성심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왕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사용했던 오르시니 파의 군대는 그에게는 의심스러웠고, 그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획득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획득한 영토마저 빼앗지나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프랑스 왕 역시 비슷하게 행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공작은 오르시니 파 군대의 충성심에 대한 심증을, 파엔차를 점령한 후 볼로냐로 진격했을 때 군대가 마지못해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굳혔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왕의 진의는, 그가 우르비노 공국을 점령하고 토스카나로 진격했을 때 왕이 그에게 그 공격을 단념하도록 하는 것을 보면서,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불총스러운 장군의 제거
그러자 공작은 더 이상 타인의 군대와 호의에 의존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로마의 오르시니 파롸 콜론나 파에 속하는 많은 귀족 신분의 추종자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고 후한 봉급을 줌으로써 두 파벌의 세력을 위축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을 각자의 자질에 따라서 대우하고, 군사적인 지위와 관직을 부여했습니다. 그 결과 불과 수개월 만에 그들은 대대로 내려오던 예전의 파벌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질적으로 공작에게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발렌티노 공작은 콜론나 파의 지도자들을 진작 분열시킨 후에 오르시니 파의 지도자들을 섬멸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러한 기회가 왔고 그는 이를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오르시니 파의 지도자들은 뒤늦게나마 공작과 교회의 강력한 세력이 자신들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하여 페루자 지방의 마조네에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회합 이후 우르비노 지역에서의 반란, 로마냐 지방에서의 소요 등 무수히 많은 위험이 공작에게 들이닥치지만, 공작은 이 모든 위험을 프랑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자신의 위신을 되찾았지만, 그는 프랑스 왕과 모든 다른 외부세력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외부세력에게 의존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이제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주 교묘하게 자신의 진심을 숨기고 파울로 영주를 통해서 오르시니 파의 지도자들과 화해했습니다. 공작은 파울로를 안심시키려고 매우 정중하고 관대하게 대접하면서 돈, 화려한 옷, 말을 주는 등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순진하게 이를 믿고 그들은 시니갈리아에 와서 공작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그 지도자들을 죽이고 그 추종자들을 포섭함으로써 공작은 매우 확고한 권력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르비노 공국과 더불어 로마냐의 전 지역을 장악했고, 특히 로마냐 주민들이 그의 지배하에서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자 민심이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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