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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후감(군주론, 인간관계론, 행복론)

군주론-10 (로마냐의 평화)

by cchhbb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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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10 로마냐의 평화

로마냐의 평화 : 레미로 데 오르코

그가 이 지역에서 시행한 정책은 알릴 만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방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저는 이에 대한 논의를 생략할 수 없습니다. 로마냐 지방을 점령한 후, 공작은 무능한 영주들이 그곳을 다스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의 영주들은 그것을 다스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의 영주들은 신민들을 올바르게 다스리기는커녕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때문에 영주들 스스로가 질서보다는 무질서의 근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지역은 도둑질, 싸움 그리고 온갖 불법적인 행위가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을 평정하고 주민들을 그의 군주적 권위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선정을 베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레미로 데 오르코라는 잔인하지만 정력적인 인물을 그곳에 파견하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레미로는 단기간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했으며, 가공할 만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공작은 레미로의 너무 큰 권력이 반감을 살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작은 그 지역의 중심부에 저명한 재판장이 관장하는 시민 재판소를 설치하고, 각 도시로 하여금 법률가를 파견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취해온 엄격한 조치로 인해서 공작 자신이 인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반감을 무마시키고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제껏 행해진 잔인한 조치는 모두 그가 시킨 일이 아니라 그의 대리인의 잔인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 레미로의 시체를, 형을 집행한 나무토막 및 피 묻은 칼과 함께 체세나 광장에 전시했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본 인민들은 한편 만족을 느끼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체사레 보르자와 프랑스의 왕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리하여 공작은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고, 자신을 위험할 수 있는 주변 세력을 대부분 격파했기 때문에 대단히 강력해졌으며, 기존의 위험에 대해서 상당한 안정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영토를 병합하려고 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에 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공작은 프랑스 왕이 자신의 실책을 뒤늦게 깨닫고, 이 계획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작은 새로운 동맹을 찾기 시작했고, 기에타를 포위 중인 스페인 군대를 향해서 프랑스 인들이 나폴리 왕국에서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을 때, 프랑스 왕에 대해서 미봉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의도는 프랑스 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황 알렉산데르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조만간 성공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이 그가 당면 상황에 대해서 취한 조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보르자의 대비책

그런데 미래에 대한 보르자의 주된 두려움은 새 교황이 즉위하면 그에게 적대적이어서 교황 알렉산데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네 가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러한 기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첫째, 그가 빼앗은 영토의 지배자들의 혈통을 단절시켜 새로운 교황이 그들에게 권력을 되돌려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미연에 방지했습니다. 둘째, 이전에 이미 말한 것처럼 로마의 귀족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음 그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교황을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가능한 한, 추기경 회의단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넷째, 교황이 죽기 전에 자신의 권력을 크게 확장하여 공격을 받더라도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목표들 가운데에서 세 가지를 그는 알렉산데르가 죽을 무렵에 성취했으며, 넷째 목표도 거의 달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토를 빼앗긴 지배자들의 많은 가족들을 가능한 한 살해했고, 단지 소수만이 화를 모면하는 데에 불과했으며, 로마 귀족과 대부분의 추기경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는 일에 관해서 그는 토스카나 지방의 패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미 페루자와 피옴비노를 장악했으며, 피사는 그의 보호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ㄱ는 프랑스 세력에 대해서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피사를 급습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한편으로 피렌체에 대한 시기심이 섞인 증오와, 다른 한편으로 공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루카와 시에나가 곧 항복했을 것이고, 피렌체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 모든 계획에서 성공했더라면, 그는 막대한 군사력과 막강한 명성을 얻었을 것이고, 따라서 견고한 권력을 구축했을 것이며, 더 이상 타인의 호의나 군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역량으로 자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것을 예견했지만, 모든 것을 예견하지는 못했던 공작

그러나 공작이 칼을 든 지 5년 만에 알렉산데르 교황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지 로마냐 지방만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고, 나머지 영토는 강력한 두 적대세력 사이에서 허공에 뜨고 말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크게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작은 불굴의 정신과 탁월한 역량이 있었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파멸시켜야 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단기간이지만 권력의 견고한 토대를 성공적으로 구축했기 때문에, 강력한 군사력과 맞서지 않았더라면 또는 건강이 양호했더라면,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권력의 토대가 견고했다는 점은 다음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로마냐의 인민들은 한 달 이상이나 그를 기다렸습니다. 로마에서는 그가 거의 반죽음의 상태였는데도 안전했습니다. 게다가 발리오니차, 비텔리파, 오르시니파의 지도자들이 로마에 왔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반란도 선동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비록 자신이 원하는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반대하는 사람이 선출되는 일만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가 죽었을 때, 그가 건강하기만 했더라도, 만사는 잘 풀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던 바로 그날, 그는 저에게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부친이 죽을 때 일어날 법한 모든 일을 미리 생각해두었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놓았는데, 단지 그의 부친이 죽었을 때, 그 자신도 생사의 기로에 있을 줄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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