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후감(군주론, 인간관계론, 행복론)

군주론-4 (로마인들이 채택한 통치방식)

by cchhbb 2022. 10. 30.
반응형

군주론4 로마인들이 채탹한

로마인의 통치방식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이러한 정책들을 아주 훌륭하게 시행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를 세우고, 약소 세력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강력한 세력을 진압하고,

점령자에서 강력한 위세가 영향력을 얻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적절한 사례로써 저는 단지 크리스의 경우만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아카이아인들 및 아이톨리아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켰고,

안티오코스를 몰아냈습니다.하지만 로마인들은, 아카이아인들이나 아이톨리아인들이 비록 많은 공헌을 했지만,그들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필리포스는 동맹국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간곡히 설득했지만, 로마인들은 그가 굴복하기 전에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티오코스가 강력한 세력으로 버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어떠한 영토도 그에게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선견지명: 전쟁을 지연시키는 것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인들은 현명한 군주라면 누구나 취해야만 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현재의 분규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분규에 대한 배려를 필요로 하며, 특히 미래의 분규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규를 그 최초의 징후부터 감지하면, 처방을 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만약 분규를 방치하여 대책이 너무 늦어지면, 병폐를 치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소모성 열병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 병은 초기에는 치료하기는 쉬우나 진단하기가 어려운 데에 반해서, 초기에 발견하여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일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문제를 일찍이 인지하면,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되어 모든 사람이 알아차릴 정도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재난을 미리부터 예견했기 때문에 항상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화근이 자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이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에게 유리하도록 지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필리포스와 안티오코스를 맞아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선수를 쳐서 그리스에서 그들과 전쟁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그리스에서 그 두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을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피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더욱이 로마인들은 우리 시대의 현인들이 늘상 말하는 시간을 끌면서 이익을 취하라는 격언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과 현명함에서 비롯되는 이익을 취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모든 것을 몰고 오며, 해악은 물론 이익을, 이익은 물론 해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루이 12세가 거둔 초기의 성공

그런데 다시 프랑스 왕의 사례로 돌아가서, 우리가 주장했던 것들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왕이 행했는지 검토해보겠습니다.

저는 샤를 왕이 아니라 루이왕의 경우를 논하겠습니다. 루이 왕은 이탈리아에서 영토를 훨씬 더 오랫동안 유지했고, 따라서 그의 행적을 더욱 상세하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다른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행해야 하는 정책과 정반대의 정책을 시행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이 왕의 이탈리아 침입은 베네치아인들의 야망에 의해서 추동되었는데, 그들은 그 침입을 틈타서 롬바르디아 영토의 반을 획득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루이 왕이 택한 이 결정을 비난할 의도는 없습니다. 왕은 이탈리아에서 발판을 구축하고 싶어 했지만, 그곳에서 어떠한 동맹도 맺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맺을 수 있는 동맹이라면 어떤 동맹이든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른 일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 좋은 결정은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가 롬바르디아를 정복했을 때, 그는 샤를 왕 대문에 실추되었던 명성을 즉각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노바는 항복했고, 피렌체는 그의 동맹국이 되었습니다. 만토바 후작, 페라라 공작 벤티볼리오 공작, 푸를리 백작 부인 파엔차 페사로 리미니, 카메리노, 피옴비노의 영주들 그리고 루카, 피사 및 시에나의 인민들이 그에게 접근하여 동맹국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제야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경솔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롬바르디아에서 불과 몇 군데의 영지를 욕심내다가 그들은 프랑스 왕이 전체 이탈리아 반도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만든 꼴이 되었습니다.

 

만약 루이 왕이 앞에서 제시한 규칙을 따르고 이 모든 동맹국들을 유지하고 보호했더라면, 이탈리아에서의 명성을 별 어려움 없이 확보했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많은 동맹국들이 있었고 동시에 그 동맹국들은 허약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나머지 강대국들로 부터 쉽게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이 왕은 밀라노에 입성하자마자, 교황 알렌산데르의 로마냐 지방 정복을 도와줌으로써 제가 제안한 것과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러한 결정이 한편으로 자신을 약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막강한 권위의 근원인 교회의 영적인 권력에다 많은 속권을 보태줌으로써 교회를 강성하게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실 수를 저지른 후 이를 만회하려다가 다른 실수를 거듭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알렉산데르의 야심을 견제하고 알렉산데르가 토스카나 지방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자신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 세력을 강화시키고 자신의 동맹국들을 상실하는 것으로도 그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폴리 왕국을 탐냈기 때문에, 그 왕 국을 스페인 왕과 분할했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는 루이 왕이 거의 단독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했으나, 이제 그는 이탈리아의 야심가들이나 그에게  불만을 품은 불평분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지배자를 끌어들인 셈이 되었습니다. 루이 왕은 자신에게 충성스럽게 진상할 수 있는 왕을 나폴리 왕국에서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자신을 몰아낼 수 있는 자를 앉혀놓고 말았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