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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후감(군주론, 인간관계론, 행복론)

군주론-21 (오직 다른 나라 인민의 재산만 넉넉하게 써라)

by cchhbb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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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21 오직 다른 나라 인민

오직 다른 나라 인민의 재산만 넉넉하게 써라

따라서 군주는 신민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기 위해서, 가난하여 경멸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탐욕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인색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색함이야말로 통치를 가능하도록 하는 악덕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는 넉넉한 씀씀이로써 권력을 얻었고 많은 다른 사람들 역시 씀씀이가 넉넉하고 또 그렇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높은 지위에 올라갔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당신이 이미 지배자가 되었는가 아니면 지배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인가에 따라서 다르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전자의 경우, 넉넉한 씀씀이는 유해하고, 후자의 경우, 씀씀이가 넉넉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권력을 추구했던 인물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다은에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씀씀이를 줄이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권력을 잃었을 것입니다.

 

무척 관후하다고 생각된 많은 군주들이 괄목할 만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저는 군주는 그 자신의 또는 신민의 소유물을 쓰거나 아니면 타인의 것을 쓰게 되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인색해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가급적 씀씀이가 넉넉해야 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전리품, 약탈물, 배상금 등으로 군대를 지탱하는 군주는 타인의 재물을 처분하여 씁니다. 이 경우 그는 씀씀이가 넉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키로스, 카이사르,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나 신민들의 것이 아닌 재물로는 아주 후하게 선심을 써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것을 후하게 주는 것은 결코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높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해가 되는 경우란 단지 당신의 것을 함부로 주는 경우입니다.

자기 소모적인 관후함

관후함처럼 자기 소모적인 것은 없습니다. 당신이 그 미덕을 행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그 미덕을 계속 실천할 수 없게 됩니다. 당신은 빈곤해져 경멸을 받거나, 아니면 빈곤을 피하려는 당신의 노력으로 인해서 탐욕적이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됩니다. 군주란 모름지기 경멸당하고 미움받는 일을 경계해야 하는데, 관후함은 이 두 길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비난은 받되 미움은 받지 않는, 인색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한 방책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관후하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서 결국 악평은 물론 미움까지 받게 되는, 탐욕스럽다는 평판을 얻게 되는 처지에 봉착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제17장

잔인함과 인자함,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나은가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이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성품들로 돌아가서, 저는 모든 군주들이 잔인하지 않고 인자하다고 생각되기를 더 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자비를 부적절한 방법으로 베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하다고 생각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조치들은 로마냐 지방에 질서를 회복시켰고, 그 지역을 통일시켰고 또한 평화롭고 충성스러운 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보르자의 행동을 잘 생각해보면, 잔인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을 피하려고 피스토이아가 사분오열 되도록 방치한 피렌체인들과 비교할 때, 그가 훨씬 더 자비롭다고 판단될 만합니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신민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무질서를 방치해야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씬 더 자비로운 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는 데에 반해 군주가 명령한 처형은 단지 특정한 개인들만을 해치는 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신생 국가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군주들 중에서도 특히 신생 군주는 잔인하다는 평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베르길리우스는 디도의 입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가혹하고 내 왕국은 신생 왕국이어서 나는 그런 조치를 취했고 국경의 구석구석을 방어했노라.

절제된 엄격함

그렇지만 군주는 참소를 믿고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취할 때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우유부단해서도 안 됩니다. 군주는 적절하게 신중하고 자애롭게 행동해야 하며,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서 경솔하게 처신하거나 의심이 너무 많아 주위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런데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더 나은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제  견해는 사랑도 느끼게 하고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둘 다 얻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굳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저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 일반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즉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습니다.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온갖 충성을 바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막상 그럴 필요가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당신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자신의 소유물, 생명 그리고 자식마저도 바칠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정작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할 때면, 그들은 등을 돌립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그들의 약속을 믿고 다른 대책을 소홀히 한 군주는 몰락을 자초할 뿐입니다.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을 통하지 않고 물질적 대가를 주고 얻은 우정은 소유될 수 없으며, 정작 필요할 때 사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감사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그 감사의 상호관계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항상 효과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서 유지되며, 실패하는 경우가 결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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