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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후감(군주론, 인간관계론, 행복론)

군주론-17 (베네치아인들이 용병으로부터 겪은 수난)

by cchhbb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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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17 베네치아인들

베네치아인들이 용병으로부터 겪은 수난

베네치아인들의 발전사를 보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군대로, 곧 귀족과 무장한 인민들이  아주 능숙하고 용맹스럽게 전쟁에 임했을 때에, 그 나라는 안전했고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토에서 전쟁을 하게 되자마자 그들은 용맹을 포기하고 이탈리아의 전쟁 관습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내륙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용병대장들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병합된 영토가 아직 많지 않았고 베네치아 인들의 명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카르마뇰라의 통솔 하에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그들의 과오는 명백해졌습니다. 그들은 그가 매우 유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만, 반면에 그가 전쟁을 마지못해 수행하고 있다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계속 고용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병합된 영토를 잃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그를 해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에 베네치아인들은 용병대장으로 바르톨로메오다 베르가모, 로메르토 다 산 세베리노, 피티글리아노 백작 등을 기용했습니다. 이 장군들에 대해서 베네치아인들이 우려했던 것은 장군들이 승리한 후에 생길 위험이 아니라, 그들이 패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러한 우려는 나중에 바일라 전투에서 현실화되었는데, 그들은 한 번의 전투에서 그들이 800여 년 동안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얻었던 것을 일거에 잃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용병을 쓰는 것은 결과적으로 완만하고 느린 사소한 이익이 있는 반면에, 돌발적이고 놀라운 손해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용병의 역사

이런 사례들은 오랫동안 용병들에게 좌지우지당했던 이탈리아에서 끌어온 것들이기 때문에 저는 이 용병들에 관해서 좀 더 상세히 검토하고 싶습니다. 용병의 발생과 발전을 검토하면, 그 해결책을 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근래에 황제의 권력이 이탈리아에서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고, 교황의 세속권력이 증대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탈리아가 많은 국가들로 분열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은 대도시들이 그들을 억압하던 귀족들에게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일어났고, 교회 역시 자신의 세속권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이러한 반란들을 조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에 많은 다른 도시에서 시민들이 군주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교회와 몇몇 공화국들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서, 성직자들과 군무 경험이 없는 시민 지배자들은 외부인들을 고용하여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로마냐 사람인 알베리코 디 코니오가 용병부대의 중요성을 최초로 널리 알렸습니다. 그리고 드 귀에 다른 용병들이 등장했는데, 그중에는 당대에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브라초와스포르차의 용병이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귀를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용병을 지휘하는 많은 다른 장군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혁혁한 무훈의 결과, 이탈리아는 샤를 왕에게 공략당하고, 루이 왕에게 약탈당했으며, 페르난도 왕에게 유린당하고, 스위스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안이한 전쟁 수행

우선 용병대장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보병을 등한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데다가 고용되어야 먹고살 수 있었으므로, 적은 수의 보병은 그들의 명성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대규모의 보병을 유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보병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일정한 수입을 유지하고 명성을 성취하는 데에 적당한 만큼의 기병을 거느렸습니다. 그 결과 2만 명 규모의 군대에서 보병이 고작 2천 명 정도에 불과한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이나 병사들의 고통과 위험을 덜려고 했으며 전투에서 서로 죽이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상대방을 포로로 생포했는데, 몸값을 요구하지도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요새화 된 도시를 야간에는 공격하지 않았으며, 도시를 방어하는 용병들 또한 포위군에 대한 공격을 주저했습니다. 야영을 할 때에도 그들은 방책이나 외호로 주위를 방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행들은, 제가 말한 것처럼, 고통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군대의 규율로서 허용되고 채택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활동 결과로 이탈리아는 노예화되고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제13장  원군, 혼성군, 자국군

원군으로부터 겪은 근래의 위험한 사례들

원군이란 당신이 외부의 강력한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당신을 돕고 지켜주기 위해서 파견된 군대인데, 이 또한 용병처럼 무익한 군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군은 최근에 교황 율리우스에 의해서 이용된 적이 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용병부대가 페라라전투에서 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스페인의 페르난도 왕에게 자신을 도울 군대를 파견하게 함으로써 원군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원군은 그 자체로서는 유능하고 효과적이지만, 원군에 의지하는 자에게는 거의 항상 유해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패배하면 당신은 몰락할 것이고, 그들이 승리하면 당신은 그들의 처분에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지만, 저는 근래에 일어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사례를 논의하고 싶습니다. 그의 결정은 너무나 성급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페라라를 얻기 위해서 외국 군주의 수중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다니! 그러나 그는 운이 좋아서 잘못된 정책에서 초래된 결과를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요청한 원군들이 라벤나에서 패주 했을 때, 스위스 군이 도착하여 승자를 몰아냈고, 그 결과 그는 적들의 수중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게다가 승리를 거둔 자는 원군이 아니라 다른 군대였으므로, 원군의 처분에 내맡겨지는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피렌체는 전혀 무력이 없었기 때문에, 피사를 정복하기 위해서 1만 명의 프랑스 병력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서 피렌체는 자신의 시련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를 맞이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동족과 싸우기 위해서 1만 명의 투르크 병력을 그리스로 불러들였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투르크 군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를 발단으로 해서 그리스는 이교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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